노자
평점 7 / 10
책 <노자> 도가사상으로 잘 알려진 노자가 설파한 이야기를 묶은 책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노자의 노(老)는 늙은 또는 오래됨을 뜻한다. 즉, 늙은 스승(Old Master)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도교에서는 노자를 거의 신격화하고 있지만, 그의 생전 기록이나 저서가 언제 완성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노자가 지은 책을 <노자> 또는 <도덕경>으로 불린다. <노자>를 보면 문장의 전후가 완만하게 연결되지 않고 여기저기 듬성듬성 섞여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노자>라는 책이 아마 여러 사람이 쓴 것으로 추측될 수 있다. 노자는 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적 존재와 원리를 도와 덕으로 설파하며 중국의 철학 / 정치 / 종교 / 문화 등 다방면에서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을 집필한 역주자는 최재목 교수님이다. 현재 영남대 철학과 교수님이며, 수년간 도가철학과 불교철학을 연구해오고 계시다. 노자 책 원서는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다. 이를테면, 초간본, 백서본, 왕필본 등 여러 종류가 있다. 게다가 주해가 / 해설가들의 관점으로 견해가 상반되어 어느 방향에 맞추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교수님은 <노자> 가운데 가장 오래된 판본인 <곽점초묘죽간본> (초간본)을 주해했다. 가장 오래된 판본이라는 점에서 <노자>를 풀어헤치는데 의미를 두고 있다. 교수님은 개인적으로 <노자>의 소박하고 간명한 메시지가 많이 끌린다고 고백했다. 인간의 마음을 깊숙이 파고드는 힘, 그것은 짧고도 살아있는 말이다. <노자>는 "모든 길은 스스로 / 저절로 그러한 것"이라고 말한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다.
평소에 좋아하는 스노우 폭스 김승호 회장님께서 노자철학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나는 <노자>책을 찾아 펼쳤다. 원래 <노자> 책은 예전에 동생이 읽으라고 가져다 준 책인데, 고전에 별 관심이 없는 나는 이 책을 오랫동안 묵혀두고 있었다. 덕분에 <노자>를 읽어보면서 "왜 고전을 읽어야하는지" 나를 다시 상기시킨다. 괜히 고전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 조상들이 했던 말들을 소홀히 들어선 안된다. 앞으로 동양 철학 / 서양 철학을 두루 읽으며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더 다듬어야겠다.
지모를 끊고 괴변을 버리면
지모를 끊고 괴변을 버리면, 백성들 이익은 백 배나 된다.
기교를 끊고 이익을 버리면, 도적이 없어진다.
작위를 끊고 사려를 버리면, 백성들이 효성 / 자애로 돌아간다.
세 문장으로써는 무언가가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되어
혹시 아래의 내용을 덧붙이면 어떨까 한다.
소박함을 드러내고 순박함을 간직하며,
사사로움을 줄이고 욕심을 적게 한다.
>> 노자는 "소박함을 드러내고 순박함을 간직할 것"을 주장했다. 노자는 통치자(관리자)가 백성들을 제발 있는 그대로 가만히 두라고 조언한다. 그러면 백성들은 천성적인 자연의 효자를 회복하여 오히려 더 잘 다스려진다고 보았다.
강과 바다가 수 많은 골짜기의 왕이 되는 까닭은
강과 바다가 수 많은 골짜기를 거느리는 왕이 되는 까닭은
그가 능히 수많은 골짜기의 아래가 되기 때문이니,
능히 수많은 골짜기의 왕이 되는 것이다.
성인이 백성의 앞에 있는 것은 몸을 뒤로 물리기 때문이다.
성인이 백성의 위에 있는 것은 그들에게 말을 낮추기 때문이다.
그가 백성 위에 있지만 백성들은 그를 부담스러워하지 않는다.
그가 백성 앞에 있지만, 백성들은 그를 해롭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천하가 즐겁게 그를 떠받들며 싫다하지 않는다.
그가 다투지 않음으로써 하기 때문이다.
천하가 능히 그와 더불어 다툴 수가 없다.
>> 노자는 "통치자(관리자)가 스스로 낮추고 아래에 물러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간디의 무저항 비폭력주의와 통하는 점이 있다. 최고의 통치자는 통치를 하되 통치를 하고 있는 사람의 존재자체가 의식되지 않아야 한다. 누구나 통치자의 통제나 규제로 인해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은 "자기 스스로 하고 있다"는 의식을 갖게 한다면, 그것이 바로 최선의 통치임을 말하고 있다. 스스로 낮추고 자신을 뒤로 물리면 물릴수록 오히려 백성들에게 추앙받는 왕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통치자들이 앞서고 위에 있음을 의식된다면 그것은 모두 백성들에게 참을 수 없는 부담과 피해로 돌아간다는 것을 노자는 잘 알고 있었다.
죄는 욕심 부리는 것보다 더 무거운 것이 없다
죄는 욕심 부리는 것보다 더 무거운 것이 없고,
허물은 자기 것으로 얻으려는 것보다 분에 넘침이 없고,
화는 만족을 모르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
만족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곧 만족함이라는 것,
이것이 항상 만족함이다.
>> 노자는 인간의 욕심이 죄를 범하게 하고, 욕심의 결과 죄는 자꾸 증대되어 끝내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가게 된다고 보았다. 권력은 내부에서 별로 얻은 것이 없으면 바깥으로 눈을 돌려 다른 나라를 침입하고 사람의 목숨을 해치며 엄청난 재난을 만들어낸다.
역사상 식민 지배나 현재 자본주의도 권력의 생리를 닮아 있다. 마치 경기하듯이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를 외친다. 통치자들이 만족할 줄을 모르고 일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큰 재앙이 됨을 노자는 지적한다.
현재 입고 있는 것, 먹고 있는 것, 살고 있는 것, 생각하고 있는 것, 갖고 있는 것에 대해 풍족해 하고 만족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곧 죄, 허물, 화가 없는 '항상 만족함' 이라는 것을 노자는 역설한다.
도로써 군주를 보좌하는 사람은
도로써 군주를 보좌하는 사람은
병력(군대)으로써 천하에 강압하려 하지 않는다.
일을 잘 수행하는 사람은 일을 끝냄을 추구할 뿐이며, 강함을 취하지 않는다.
일을 이루어도 자랑하지 않으며, 일을 이루어도 교만하지 않으며, 일을 이루어도 뽑내지 않는다.
이것을 '과이불강 (일을 이루되 강해지지 않음)'이라 이른다.
그것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 노자는 무력을 사용하는 일은 반드시 보복을 부르기 마련이라고 경고한다. 무력을 남용한다면 결국 자신이 그 결과를 받을 것이다. 결국 무력으로 일어서는 자는 반드시 무력에 의해 스스로 멸망해간다. 자멸을 초래하고 만다.
본래의 목적을 이루고도 오히려 자만하지 않고, 목적을 이루고도 오히려 뽐내지 않고, 목적을 이루고도 오히려 자랑하지 않고, 목적을 이루고도 어쩔 수 없이 한 것이라 생각하고, 목적을 이루고도 오히려 자신의 능력이 강하다고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스스로 그러하다는 것, 즉 자연에 맡기는 것이다. 강하게 압제하거나 무력적인 것을 들이대면서 인민을 통제하고자 해도 그 인위적인 힘은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역사 속의 무력적 제국들이 그랬다. 자연의 도에 부합하지 않으면 금방 사라지고 만다
먼 옛날 훌륭히 일을 잘 해내는 사람
먼 옛날 훌륭히 일을 잘 해내는 사람은
반드시 남모르게 궁극적인 근원자(도)에 이르니 능력이 사방에 다다르니
깊고 깊어서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형용해 보겠다.
조심스럽고 신중함이여, 겨울에 강을 건너는 듯하고
근신하고 경계함이여 사방의 공격에 대비하는 듯하고
엄숙하고 장엄함이여 손님이 된 듯하고
융화하고 친함이여 얼음이 녹는 듯하고
돈후하고 순박함이여, 아직 조각하지 않은 통나무와 같고
혼연하고 순후함이여 혼탁한 물과 같다.
누가 능히 혼탁한 (물을) 안정시켜 천천히 맑게 할 수 있겠는가?
누가 능히 안정되게 머무르는 가운데서 서서히 생동하게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도를 지키는 사람은 언제나 가득 채우려 하지 않는다.
>>도를 체득했다는 말은 도를 내 몸에 얻어 도와 내가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말이다. 도를 실현 / 구현하는 것이 덕이다. 덕은 도를 몸에 얻은 것(체득)으로, 도에 따라 마음이 곧게 나아가는 것이다.
노자의 경우, 비교적 고요하고 순박하며 근엄하고 신중한 면이 부각되어 있다.
장자의 경우, 비교적 유유자적하고 고매하고 뛰어난 면이 부각되어 있다.
일삼아 하려고 하면 실패하고
일삼아 하려고 하면 실패하고 붙잡으려 하면 잃는다.
이래서 성인은 함(작위함)이 없다. 그러므로 실패하지 않으며,
붙잡으려 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잃지 아니한다.
일에 임하는 원칙은 일 마무리를 신중하게 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는 것이다.
여기에 실패하는 일이 없다.
성인은 바라지 않는 것을 바라며,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가르치지 아니함을 가르치며, 사람들이 지나친 바를 되돌아오게 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잘 만물이 스스로 그러한 것을 도와줄 뿐이다.
그래서 하려고 하지 아니한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하다는 뜻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모두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스스로 그러하다는 것은 만물들이 자신의 내재한 힘에 따라서 스스로 그러하게 생성, 변화, 완성, 소멸되어 간다는 말이다. 이 만물의 자연을 잘 도와주는 것이 통치자의 역할이며, 작위적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실패할 뿐이라고 노자는 충고한다.
사람들이 지나친 바를 본래의 상태대로, 본래의 위치로 되돌아오게 할 뿐이다.
도는 항상 무위이다
도는 항상 함이 없다.
왕과 제후들이 이것을 지킨다면 만민은 스스로 일을 할 것이다.
일부러 하여서 일을 만들고자 한다면 이를 '이름 없는 통나무'로써 진정시켜야 한다.
대저 만족함을 알게 해야 한다.
만족함을 알아 고요해지니, 만민은 스스로 안정을 이루어 간다.
>>이상적인 정치란 일부러 변하려하지 않아도, 스스로 변화해 가는 것임을 말한다. 통치자의 태도가 '무위'에서 나와야 하고, 자연스러움에 따르고 맡겨두고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도는 절대로 '이름을 가지지 않는 것', '이름을 넘어선 그 무엇'이다.
'무명지박', 도를 사용한다면 후왕 스스로가 제한 없는 욕망 추구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함이 없음을 한다
도를 파악하는 자는 함이 없음을 하며, 일삼음 없음을 일삼고, 맛 없는 맛을 맛본다.
크고 작은 일에는 쉬운 일이 많으면 반드시 어려움도 많다.
이 때문에 성인은 이 일을 어렵게 여긴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없다.
>>크고 작은 일에는, 쉬운 일이 많으면 반드시 어려운 일도 많다. 중국에서는 '일 없다'는 말을 자주 쓴다. 일이 없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것이다. 온갖 자잘한 간섭이나 신경 씀을 그만두고 내버려두라는 말도 된다. 통치술이란 그 정도로 어렵고도 신중한 일이어야 함을 역설하는 대목이다.
천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데, 그것은 추한 것이다
천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데, 그것은 추한 것이다.
천하 사람들이 모두 착한 것을 착하다고 알고 있는데, 착하지 않은 것이다.
있음과 없음은 상호 규정적으로 생기며, 어려움과 쉬움은 상호 규정적으로 이루어진다.
긺과 짦음은 상호 규정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높음과 낮음은 상호 규정적으로 만들어진다.
화합된 소리와 개별적인 소리는 상호 규정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앞과 뒤는 상호 규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무위의 일에 처신하며 말로 나타내지 않는 가르침을 편다.
만물은 탄생하나 다스리지 아니하며, 성장하나 기대지 아니하며, 완성하나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저 오직 머무르지 않기에 이 때문에 사라지지 않는다.
>>인위를 버리고 사물의 자연에 맡겨두라는 말을 하고 있다. 만물에 대해 자기 방식으로 판단하지 마라 ! 그대로 내버려두라 ! 고 한다. 도를 지닌 사람은 오히려 자의적으로 일을 하거나, 조작하지 않으며, 주관적 집착과 독단적인 판단을 초월하여, '무위'로 일을 처리하고 '불언'으로 가르침을 행한다.
성인은 일을 행하는데 자연의 규율을 따라서 행하며 억지로 하거나 함부로 하지 않는다. 하늘과 땅 사이에 만물은 스스로 생겨나 자라면서 각자 자신의 모습을 지닌다. 성인은 단지 옆에서 보조하며, 각자의 생명의 창달과 실현에 맡겨서 그 각자에 풍부히 내재된 것을 온전히 펼치도록 할 뿐이다.
"성인은 만물이 탄생하나 다스리지 아니하며 성장하나 거기에 소유하려는 사심을 개입하여 기대지 아니하며, 완성되나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렇게 머무르지 않기에, 그가 군림한 지위는 그곳에서 영영 사라지지 않는다."
도는 언제나 이름이 없다
도는 언제나 이름이 없다.
손대지 않은 통나무는 비록 작다고 하나, 천지도 감히 부릴 수 없다.
제후와 왕들이 만일 그것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으면 천하 만민들이 저절로 복종할 것이며,
하늘과 땅도 서로 모여서 감로를 내린다.
백성들에게 명령함이 없다.
그런데도 스스로 해서 다스려진다.
처음으로 마름질을 하고서야 이름이 있게 된다.
이름이 있고 나서는 대저 멈출 줄을 알아야 한다.
멈출 데를 알기에 위험하지 않다.
도가 천하에 있음을 비유하면, 마치 작은 계곡과 강해의 관계와 같다.
>>제후와 제왕이 무명의 질박한 도를 지킬 수 있다면, 백성들은 당연히 편안하고 유유자적하여 제각기 자신의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통치자가 있고 국가사회가 있으면, 당연히 통치 규율을 위한 명분이 정해지고 관직이 설치되며, 시비선악이 분명히 설정된다. 일들이 복잡해지고, 정치 파벌 간, 사람들 사이에 시비를 따지는 쟁론이 생겨난다. 모두 명칭과 관계된 것이다.
무언가가 있었는데 하나로 이루어져 있었다
무언가가 있었는데 하나로 이루어져 있었다.
천지에 앞서서 생겨났다.
고요하고 깊으며, 비길 것 없이 홀로 있으며, 바뀌지 않는다.
천하의 어미라 할 만하다.
아직 그 본래의 이름을 모른다.
이를 별명을 붙여서 '도'라고 한다.
나는 억지로 거기에 이름을 붙여서 '대'라고 한다.
극대해지면 가고, 가면 멀어지며, 멀어지면 다시 되돌아온다.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도도 크며, 왕 또한 크다.
나라 가운데 네 가지 큰 것이 있으니 왕은 그 가운데 하나로 있는 것이다.
사람은 땅을 본받았으며, 땅은 하늘을 본받았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았으며, 도는 자연을 본받은 것이다.
>> 도는 하나로 된 혼연한 상태를 말한다. 어떤 부분들이 조합, 집합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의 원만하고 자족하며 조화로운 상태이다. 도는 절대적이며, 유일무이한 것이다. 도는 끊임없이 운행하고 있으며, 그 자체는 운동과 변화에 의해 소실되지 않고, 사계절이 반복되듯이, 순환한다. 도는 순환적 운행이기에 운동이 끝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새롭게 시작한다.
노자가 말하려는 도법자연은 '사대'의 논리처럼 도 그 위 차원에 다시 모범으로 할 만한 자연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도의 본질적 내용을 새롭게 해석한 것, 즉 도의 본성을 '스스로 그러하다'는 세계의 자율성으로 한정한 것이다. 자연은 실체가 아니다. 세계의 자율성을 특별히 형용한 것이다. 도라는 것을 '자연'으로 '무위'로 풀이하고 있다.
하늘과 땅 사이는 풀무와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늘과 땅 사이는 풀무와 같은 것이 아닌가
텅 비어 있으나 다함이 없고, 움직일수록 더 많은 것들이 생겨 나온다.
>>노자는 '텅 비어 있음'을 무궁무진한 창조성을 함유하고 있다. 만물이 생성되고 그치지 않는 텅 비어 있음 속에서의 움직임은 바로 만물을 생산하는 근원을 묘사한 것이다. 노자가 말한 '텅 비어 있음'은 소극적인 관념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 창조적인 관념이다.
텅 빔을 이루는 것이 지극하고
텅 빔을 이루는 것이 지극하고, 비움을 지킴이 독실하면 만물이 두루 흥기하지만 제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아간다.
하늘의 도는 돌고 돌기에 각기 그 근원으로 되돌아간다.
>> 모든 존재가 각기 본성으로 돌아가는 것은 자기의 타고난 명을 성찰하는 것이다. 하늘의 도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본래 돌고 도는 것이다. 모든 것을 '스스로 그러한' 제자리로 되돌려준다. 만물은 모두 자기의 근원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제 있어야 할 자리가 바로 삶의 근원적 고향이다.
모두 변화 속에 있다
노자에서 언급한 <복>에 대해 여러 학자들의 해석을 진고웅의 주석을 통해 살펴본다.
우주는 움직이는 것으로 모두 변화 속에 있다. 변화의 규율은 어떠한가? 변화 속에 향상된 것이 있다고 인정하면, 이 변화 속에서 향상된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중국 철학에서 말하는 변화의 규율은 바로 반복이다. 모두 반복의 규율을 따라서 변화한다. 무엇을 반복이라고 하는가? 바로 사물이 한 방향으로 연변하여 극점에 도달하여, 더 이상 나아가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한번 변하면 그 반면이 되고, 이처럼 그치지 않는다.
사물은 무에서 유로 생겨나고, 생겨나면 점점 충만해지며, 점차 발전하여 최고로 성하게 되면 곧 쇠퇴하고 물러나 결국은 쇠망하게 된다. 끝은 곧 시작하는 것으로 새로운 사물이 생겨난다. 모든 사물은 자라남에서 떨어지니 이것을 반이라 한다. 떨어짐이 지극하여 그치면 곧 다시 시작하니 이것을 '복'이라 한다.
중국철학에서 말하는 복은 주로 새로운 것을 다시 시작한다는 뜻이다. 합쳐진다는 뜻은 없다.
형세가 안정되었을 때는 유지하기 쉽고
형세가 안정되었을 때는 유지하기 쉽다.
아직 일의 조짐이 없을 때는 도모하기 쉽다.
무를 때는 풀기가 쉽다.
미세한 것일 때 뒤쫓기 쉽다.
어떤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을 때 처리하고, 아직 혼란해지지 않았을 때 다스려야 한다.
아름드리 나무도 자그마한 싹에서 자라나고, 높디높은 건물도 한 삼태기 흙에서 시작하고 수없이 먼 것도 한 발자국에서 시작한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라고 하듯, 가까운 곳에서 시작해서 먼 곳에 도달하며, 아무리 큰일이라도 작은 것에서 이루어진다. 아무리 원대한 일이라 하더라도 작은 것이 이루어져 완성되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모든 일에 도가 관여되듯 작은 것들의 관여로 큰 것이 이루어진다. 작은 일에서 쉽게 막을 수 있는 것도 시기를 놓치면 엄청난 시간과 비용, 수고를 들이는 큰일로 발전한다.
도를 체득한 통치자는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무위로써 처리해가지만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듯 신중하고 작은 것에 온 목숨을 걸듯 신경을 쓰는 법이다.
마치 도가 천하 만물에 관여하고 있듯이 말이다.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그 구멍을 막고, 그 문을 닫으며, 그 빛을 조화롭게 하고 그 티끌과 통하며 날카로움을 꺾고, 어지러움을 풀어준다.
이것을 '현묘하게 하나가 됨'이라고 한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또한 멀리할 수도 없으며, 이롭다 할 수도 없고, 해롭다 할 수도 없으며, 귀하다 할 수도, 천하다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천하의 귀함이 된다.
>>노자가 말하는 '말하지 않고 (불언), 알지 못하는 (부지)' 대상은 도 만이 아니라 도를 포함한 세계의 모든 현상이다. 노자는 아는 자의 감각 / 인식의 구멍을 막고, 그 문을 닫으며, 빛을 주위와 조화롭게하고 만물의 티끌과 통하며, 날카로움을 꺾고, 어지러움을 풀어주는 것을 '현묘하게 하나가 됨'이라고 하였다.
불빛을 쪼이면 쪼인 부분은 잘 보이고 잘 드러나지만, 빛에 가려진 어두운 곳으로는 많은 사물이 묻혀 버리고 만다. 불교의 명상과 수행은 바로 이러한 우리의 인식능력 = 분별심(스포트라이트)을 흐릿하게 하여, 판단하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것이다.
정당함으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정당함으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드러나지 않는 비법으로써 군사를 움직이며, 일삼음이 없으면, 천하를 얻는다.
내가 어째서 그것이 그러하다는 것을 알겠는가?
대저 하늘에 금기시하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백성들은 점점 더 가난해진다.
백성들에게 이로운 기기가 많으면 많을수록 나라는 점점 더 혼미해진다.
사람들에게 아는 것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기이한 것이 점점 더 생겨난다.
법령이 많이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도적이 많아진다.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일삼아 함이 없으면 백성이 스스로 부유하고, 내가 함이 없으면, 백성이 스스로 하게 된다.
내가 고요함을 좋아하면, 백성이 스스로 올바르게 된다. 내가 욕망하지 않고자 하면, 백성이 스스로 질박해진다.
>> 모든 법제, 법령, 지식을 끊고 '무위'의 통치를 하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배운 놈이 더 무섭고, 아는 놈이 더 부정하며, 가진 놈이 더 인색하다고 한다. 배우고 알고 가진다는 것, 그러한 것들이 만들어낸 많은 제도와 법령들이 결국은 인간세계의 순박함과 질박함을 훼손시켜, 화평과 화합을 해치고 만다고 노자는 본다.
노자는 "내가 일삼아 무언가를 하고자 함이 없으면, 백성이 스스로 부유하고, 내가 함이 없으면, 백성이 스스로 하게 된다. 내가 고요함을 좋아하면, 백성이 스스로 올바르게 된다. 내가 욕망하지 않고자 하면, 백성이 스스로 질박해진다."
반대되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다
반대되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다.
약하다는 것은 도의 작용이다.
천하의 물건들은 유에서 생겨나왔다.
유는 무에서 생겨나왔다.
>>노자는 반대되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라고 한다. 약하다는 것은 도의 작용이라고 한다. 반은 '복귀'의 뜻으로 풀이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반대됨' 세간의 가치평가와 다르다는 뜻이다. 도의 작용은 세간에서 존중받는 가치평가와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유'는 눈으로 볼 수도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무'에서 생겨나왔다.
지속해서 채우려는 것은
지속해서 채우려는 것은 그만둠만 못하다.
채찍질하여 군림하게 되면 오래 지킬 수가 없다.
금과 옥으로 집을 채우더라도 지킬 수가 없다.
귀하고 부하다 해서 교만하면 스스로 허물을 남기는 것이다.
공을 이루었으면 몸을 물리는 것이 하늘의 이치다.
>> 노자는 무언가를 꽉 채워서는 안 되며, 비워야 오래 지속 할 수 있다고 한다. 채움보다는 그만둠을, 교만보다는 물러섬을 말한다. 그래야 가질 수 있고, 또 앞설 수 있다고 한다. 한 사람이 공과 명예를 이룬 뒤에는 그것에다 집착하지 말고 몸을 물리라고 한다. 몸을 뒤로 물린다는 것은 결코 물러나서 떠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했다, 그래서 내 것이다"라는 식으로 '나'를 개입시켜서 판단하거나 소유욕, 집착, 욕망을 더 이상 갖지 말라고 권고한다.
내 손에서 벗어난 것은 이미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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