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전략가입니까 <중>
애플의 공동창업자인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은 장래계획서도 없이 사업을 시작했다. 1977년 당시만 해도 그들이 품은 야망은 그리 크지 않았다. 애플 초기에 만난 벤처 투자가 돈 발렌타인은 애플의 심장이 될 회로기판을 약 2,000개 정도 팔 것으로 짐작했다. "그들은 결코 큰 것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사업을 시작한지 3년이 지난 뒤 1980년이 되서야 애플은 사업보고서를 발표했다. "사람들에게 기술을 안겨주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80년대에 추진할 특명의 사입이라 생각했다" 그 기술은 특별하고 독특해야 했다. 잡스가 말했던 것처럼 그 기술은 '혼을 빼놓을 만큼 뛰어나야' 했다. 당시 IBM만이 주전산기(mainframes)를 만들었고, 나머지는 모두 컴퓨터를 취미로 만드는 사람들이였다. 1977년에 출시된 애플 2는 그저 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의 최초 독립형 컴퓨터였다.
PC가 생겨난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세계에서 애플은 중요한 차별점을 갖고 있었다. 애플은 구매자들이 항상 기술을 소중하게 여길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기업의 핵심적인 목적과 전략적 우위를 기술에 걸었다. 소비자들은 모여들기 시작했고, 애플의 기발한 디자인과 용이한 사용법 때문에 광신적인 추종 세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80년 9월까지 애플 2는 13만 대가 팔렸다. 또한 기업공개가 이뤄지면서 애플의 주식시장 평가액은 무려 18억에 달했다. 당시 애플은 포드 자동차보다 록히드사보다 가치가 높았다.
그들에게도 역경은 있었다. 워즈니악은 PC를 만드는 데는 천재였고, 잡스는 멈출 수 없는 에너지와 스타일을 아는 뛰어난 감각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누구도 경영상의 능력이나 경험이 없었다. 잡스는 대체로 '파문을 일으키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남의 말을 가로막거나 듣지 않는 데다 약속을 잊어버리거나 지키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그는 상대하기 상당히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평판이 자자했다. 전직 애플 임원은 잡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마치 벌새처럼 시속 140킬로미터로 바삐 돌아다니기를 좋아했지요"
그 사이에 빠르게 성장하던 PC 업계는 제조업체들이 차례로 새로운 특징과 더 많은 메모리 용량, 더 빠른 처리 과정, 더 나은 어플리케이션 등을 내놓음으로써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었다. 애플은 서둘러 철저한 테스트도 거치지 않은 애플 3를 서둘러 출시했다. 제대로 완성되지도 않은 컴퓨터였다. 애플 3는 새로운 소프트웨어도 거의 없었고 오류투성이였다. 이것은 애플이 처음으로 겪은 유명한 실패였다.
그 무렵 IBM (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se)은 외부업체들에게 의존하며 PC시장에 진출했다. 그들의 컴퓨터는 애플 제품만큼 결코 우아하거나 최첨단은 아니였지만, 상당히 실용적이었고 높은 평가를 받는 믿을 수 있는 회사의 제품이었다. 잡스의 애플은 독특한 기술을 보호하려 했으며, 그 기술을 다른 업체에 공개하는 데 전혀 관심이 없었다. 반대로 IBM은 기업 시스템을 개방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것으로 IBM 컴퓨터를 모방하는 업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81년 마이크로소프트 빌 게이츠와 잡스는 PC의 미래를 두고 설전을 벌였는데, 잡스는 PC가 사업용 용도를 가진 주택소유자들과 함께 중요한 도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반면에, 게이츠는 PC가 대단히 실용적인 업무용 제품으로 직장에서 더욱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장비라고 주장했다.
1983년 애플은 <리사>라는 최첨단 컴퓨터를 출시했다. 당시 PC는 한 번에 프로그램 하나와 화면 하나만을 작동시킬 수 있었으나 리사는 이 모든 복잡한 것들을 윈도우 밖으로 내던졌다. 사용자는 한 가지 이상의 기능을 열고 한 번에 두세개의 문서 작업을 할 수 있었다. 리사의 가능성은 당시에 엄청났으며, 광신자들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하지만 사업 면에서 볼 때 리사는 완전한 실패작이었다. 애플이 직접 모든 소프트웨어를 만들었지만, 애플 2나 IBM 컴퓨터와 호환되는 소프트웨어는 하나도 없었으며, 1만 달러에 달하는 비싼 소비자가격과 대조되는 심하게 느린 속도가 단점이였다. 당시 애플의 휴먼인터페이스 부문 브루스 토그나치니는 "단 한 대도 팔 수 없었다는 점을 빼면 리사는 대단한 컴퓨터였다."라고 말했다.
애플 3의 실망스런 판매와 후속조치로 이뤄진 인원삭감 이후 잡스는 사임한 애플 사장직의 후임자를 찾아내야 했다. 당시 펩시를 급부상 시킨 펩시코(PepsiCo) 사장 존 스컬리를 설득했는데, 잡스는 "남은 일생을 설탕물이나 팔면서 보내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을 바꾸길 원합니까?" 라며 스컬리의 마음을 돌렸다고 알려졌다. 여기서도 보이겠지만, 잡스가 생각하는 애플의 목적은 분명했다.
1984년 매킨토시가 출시되었다. 당시 IBM과 IBM 모방업체들은 여전히 투박한 DOS 프롬프트 명령어를 사용하고 있던 반면, 매킨토시는 우아하고 단순하게 디자인된 그래픽, 마우스 등 훨씬 더 많은 융통성을 제공했다. 하지만 매킨토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여전히 느린 속도와 개발중인 MS-DOS 표준과 호환되지도 않았다. 게다가 시대에 맞는 다양한 소프트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회사 역사상 애플은 심각한 곤경에 처했고, 31세의 천재, 잡스는 기업 대표로서는 실패했다. 비록 애플이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점은 사실이지만, 당시 개별소비자보다 더 낮은 원가와 더 높은 생산성을 의식하는 기업을 목표로 삼는 컴퓨터 업계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잡스는 애플을 떠나고 새로운 컴퓨터 제조회사인 넥스트(NeXT)를 세웠다.
이후 3명의 경영자를 거치면서 애플은 다양한 변화를 시도했다. 스컬리가 이끈 애플은 창의적인 면은 떨어졌지만, 더욱 규율 잡힌 기업이 되었다. 하지만 마진은 악화되고 성공적인 신상품을 내놓지 못하면서 마이클 스핀들러가 그 자리를 매꿨다. 그는 애플에 있는 동안 이렇다 할 솔루션을 제공하지 못하고 3년 뒤에 떠났다. 마지막으로 길 아멜리오가 애플을 이끌었지만, 애플의 매출은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애플의 운영체제야말로 대대적인 점검이 필요한 상태였다. 놀랍게도 아멜리오는 다시 스티브 잡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1997년 잡스는 다시 애플에 합류하게 되었다.
애플이 넥스트를 인수했을 당시 애플은 거의 실패한 기업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하지만 넥스트와 픽사에서의 경험으로 견문을 넓힌 잡스는 과감하게 도전에 응했다. 애플은 제품라인을 4개의 제품으로 축소하는 일부터 시작했고, 연구개발에 집중시켰다. 애플로 복귀한 잡스는 업무 실행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었고, 자신의 못된 성질을 누그러트릴 정도로 충분히 성숙해져 있었다. 실제로 잡스는 아이맥으로 애플을 다시 살아나게 만들었다. 애플이 처음 설정한 목적과 소비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한 이해력을 결합시켜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겼다.
잡스는 아이팟으로 애플을 전환점에 놓는 계기를 마련했다. "애플의 존재이유를 촉진시킨 제품이 있다면, 아이팟이 바로 그것이다. 아이팟은 애플의 엄청난 기술 기반과 손쉬운 사용법, 그리고 애플의 근사한 디자인을 결합시킨 제품이기 때문이다. 그 세 가지가 이 아이팟에서 하나로 합쳐졌다. 그게 바로 우리가 하는 일이다. 누구든 애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궁금해한다면 이 제품을 예로 제시할 것이다."
애플의 성공은 다수의 단발성 제품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다. 서로 조화롭게 작동하는 요소들로 복잡하게 짜인 시스템과 아이디어, 정체성을 연마한 결과였음을 알 수 있다. 2007년 애플은 아이폰을 출시하면서 또 다른 산업에 일대 혁명을 일으키는 과정에 진입했다. 잡스는 창조적 파괴에 대한 슘페터의 메시지를 이해했고, 그 의도를 알아챘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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